부산교통공사가 여성배려칸의 지속적 시행을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있다./아시아뉴스통신 DB |
부산교통공사의 ‘여성배려칸’이 남녀차별을 조장하고 현행법(국민인권위원회법, 교통약자증진법)을 위반하며 전국적인 반대여론에 맞닥뜨리고 있는 가운데, 시민 설문조사를 통해 지속운영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25일 부산교통공사에 따르면 이 설문조사는 ▲8월 22일부터 오는 9월 5일까지 15일간 ▲부산지역에 거소를 둔 도시철도 이용객 가운데 20세 이상의 남녀 50대50 비율로,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 설문조사에는 부산교통공사가 어떻게든 ‘설문조사’를 명분삼아 여성배려칸를 지속운영하려는 꼼수가 숨어있다.
부산교통공사의 여성배려칸 설문조사 안내 포스터./아시아뉴스통신=도남선 기자 |
◆ ‘깜깜이’ 설문조사
부산지하철을 이용하는 부산시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이번 설문조사.
그러나 눈씻고 찾아봐도 설문조사가 진행되는 곳은 찾을 수가 없다.
이에 대해 부산교통공사 관계자는 “특정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기관 직원들이 각 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상의에 명찰을 단 인원들이 각 역을 돌며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공사측은 설문조사 진행 인력이 몇명인지, 언제 어디에서 진행되는지에 대해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인 부산대 산학협력단은 7명의 인원으로 여론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저 여론조사 전문기관에 모든 것을 위임했다는 답변 뿐이었다.
부산지하철 1호선은 환승 승객을 포함해 1일 3~40만명이 이용하는데, 15일이라는 기간동안 고작 2000명의 승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다면 과연 이 인원들이 표본으로 대표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이런 식의 설문조사를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부산교통공사 관계자는 “설문조사 시간과 장소를 특정할 경우 반대여론을 가진 시민들이 몰려 설문조사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부산시민의 여성배려칸 반대여론을 지극히 의식하고 있는 듯한 답변이다.
◆ 교통약자를 배제한 설문조사
부산교통공사가 부산대 산학협력단에 여론조사를 의뢰한 과업지시서를 보면, 과업 세부내용에 여론조사 표본연령을 ‘20세 이상 70세 미만’으로 한정했다.
여성배려칸 시행 자체가 이미 교통약자증진법을 위반한 ‘위법정책’이지만 이번 여론조사도 이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다.
교통약자증진법 제2조는 ‘교통약자’를 “장애인과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 어린이 등 일상생활에서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으로 지정하고 있다.
청소년 및 어린이와, 70세 이상 고령자도 분명 사회적 교통약자이며, 이들도 분명 여성배려칸 시행에 ‘찬성’ 또는 ‘반대’ 할 자격이 충분한데도 부산교통공사는 이번 설문조사에서 이들의 배제를 전제하고 있다.
부산교통공사가 부산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여성배려칸 관련 여론조사 과업지시서 중 조사방법. 표본연령을 20세 이상에서 70세 미만으로 한정해 설문조사에서 20세 미만 청소년과 어린이, 70세 이상 고령자 등 교통약자를 배제하고 있다.(사진출처=여성배려칸 운영 부산도시철도 이용시민 설문조사 과업지시서) |
왜일까. 진정한 의미의 교통약자들의 반대여론에 부딪힐까 우려된 것은 아닐까.
부산지하철 서면역에서 만난 박 할아버지(72)는 “여성배려칸이 나같은 교통약자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로부터의 반대가 심히 걱정된 것은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함께 자리에 있던 박 할아버지의 친구 김 할아버지(73)는 “여자대통령 나왔응께 여자한테 잘보여야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거 아녀. 그러니까 우리덜 이렇게 무시하는거 아녀”라고 말했다.
◆ 설문조사 내용은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를 줄인 말인 ‘답정너’. 이번 여성배려칸 시행 설문조사에도 딱 어울리는 말이다.
아래는 이번 여성배려칸 시행 설문조사 질문 내용이다.
부산교통공사가 부산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여성배려칸 관련 여론조사 과업지시서 중 설문내용.(사진출처=여성배려칸 운영 부산도시철도 이용시민 설문조사 과업지시서) |
총 5가지 질문인데, 1번부터 3번까지는 답변자 신상에 관한 것, 4번 질문은 여성배려칸 시행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성배려칸 시행이 지속돼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5번 하나뿐이다.
그것도 필요하면 왜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왜 필요치 않은지는 생략돼 있다.
게다가 본 질문인 ‘여성배려칸 지속운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에 ‘임산부 등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성범죄 예방을 위해’를 전제해 이미 ‘예’라는 답변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서울의 여론조사 전문기관 A사 관계자는 “보통 여론조사를 의뢰한 곳에서 원하는 답변이 있기 마련인데, 5번 질문도 그런 의도가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성범죄 예방은 통상적으로 모든 이가 당연히 해야된다고 느끼는 것이지만, 이번 여성배려칸 시행에는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는 요소도 다분한데, 그에 대한 전제는 빠져 있어 편파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 어떻게 답이 나오든 믿기 힘든 설문조사 결과... 결과는 정해져 있다?
여성배려칸은 시행전부터 부산시민 대다수가 반대의견을 개진해왔다. 하지만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헌법과 관련법(교통약자증진법, 국민인권위원회법)을 위반하면서까지 강행하는데에는 필경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일각의 분석도 있다.
이번 여론조사도 마찬가지다.
20대 미만, 70세 이상의 사회적·교통약자를 설문에서 배제하고, 2000명에 불과한 표본, 게다가 ‘어떤’ 답을 유도하는 질문까지.
설문조사 결과도 부산교통공사가 수정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과업지시서에 따르면 설문조사 결과는 발주처인 부산교통공사의 승인 없이는 공표할 수 없다.
이 과업지시서(아래 사진)에는 '조사결과는 발주처의 사전 승인 없이 발표할 수 없으며... 발주처는 정책상 필요시 조사결과물의 내용을 일부 보완. 수정할 수 있음'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과업지시서에는 '조사결과는 발주처의 사전 승인 없이 발표할 수 없으며... 발주처는 정책상 필요시 조사결과물의 내용을 일부 보완. 수정할 수 있음'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 아시아뉴스통신=도남선 기자 |
조사결과가 마음에 안들면 얼마든지 부산교통공사가 원하는대로 고칠 수 있다는 말로 보인다.
이에 대해 부산교통공사는 “통상적으로 여론조사 과업지시서에 들어가는 문구”라며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결과물의 도형이나 숫자표기, 기호 등을 바꾼다는 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과연 부산교통공사의 해명처럼 도형이나 기호 등을 바꿔야 할 ‘정책상 필요’가 어떤 것인지는 쉽게 가늠되지 않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