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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웅 칼럼 - 제주살이] 이주민이 본 입춘굿·영등할망·신구간, 터전의 풍요를 비는 제주인의 지혜

[제주=아시아뉴스통신] 이재정기자 송고시간 2017-02-09 23:49

겨울의 막바지, 좀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봄의 기운을 소망
입춘굿을 맞아 제주시 관덕정에 나온 낭쉐코사를 통해 도민의 안녕을 희망한다. (사진 제공=전영웅)


"봄을 기대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사계절의 시작을 의미한다.  입춘은 한 해의 시작이며, 아직 온전히 물러가지는 않았지만 겨울의 베일을 조금씩 걷어내고 봄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때이다.  그 기운을 받아 나도 새로운 지면에서 새로운 글을 시작한다.  늦게 시작하고 일찍 기우는 제주의 겨울, 완연한 봄의 기운을 시작하는 글의 주제로 담아 본다"

하늘은 흐리고 집안에서도 바람소리가 들리는 아침이다.  마당의 티트리 나무가 바람결에 허우적거린다.  멀리 보이는 바다엔 하얀 파도가 거칠다.  집 옆 공터엔 주인이 심어놓은 마늘이 줄기를 나풀거리는데 그 사이로 꿩 한마리 먹을 것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땅이 젖어 있는 것을 보니 간밤에 비가 조금 내렸나보다.  약간은 을씨년스럽기도 한 이른 아침의 집 주변 풍경, 이제는 많이 익숙한 겨울 제주의 아침이다.

제주에서의 시작은 겨울이었다.  7년 전 이맘 때 즈음의 밤에 도착한 제주는 육지에서 입고 온 옷으로 땀이 흘렀다.  겨울이라지만 흐르는 공기 안에 온기가 느껴졌다.  어둔 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나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다만, 나는 옷을 풀어헤치고 다녔고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던 차이가 있었다.  길가 웅덩이에 고인 얼지 않은 물, 얼굴을 끊임없이 스쳐가는 번잡스런 바람, 그리고 길가 높이 서서 길다란 잎을 흔들던 야자나무..  이제는 모든 것이 평범한 풍경이 되어 그때와 별반 다름없는 겨울임에도 나는 추위를 느끼며 옷깃을 여민다.  

7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나에게 제주는 여행과 동경의 섬에서 삶의 터전으로 바뀌었다.  생소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이제는 평범하고 당연한 주변이 되었고, 여유와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표정보다는 이 섬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곤이 더 눈에 보인다.  그 사이에서 함께 얽혀있는 나 자신도, 풍경 가득한 시야에 깊이를 담으며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되었고 그냥 스쳐지나가도 좋았을 감정들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과 공간의 결을 타며, 나는 이 섬의 일부로서 자연스레 변화하고 적응하는 중이다.
 
입춘굿과 영등할망, 신구간과 포제를 통해 터전의 풍요를 비는 지혜를 확인한다. (사진 제공=전영웅)


겨울의 제주는 나름의 풍경을 간직한다.  영등할망 행차하는 이 시기에 밭담 사이나 마을 복판의 팽나무는 잎을 모두 떨군 채 바람결대로 누워있는 모습이 더욱 을씨년스럽다.  부는대로 휘어지는 것들은 죄다 바람부는 방향으로 몸을 휘청이고 있다.  하늘의 회색구름 역시 빠르게 흐르고, 그 아래 멀리 거칠게 밀리는 하얀 파도와 가까이 밭담 검은 현무암은 대조를 이루어 풍경을 더욱 싸늘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여기는 남쪽의 온기품은 섬이라는 듯, 검은 밭담 안으로 초록이 나지막히 바람에 흔들린다.  그 바람을 맞으며 겨우내 서서히 자라고 버티는 작은 것들이, 섬의 살풍경도 견뎌낼 만 한 것임을 알게 한다.   

작은 것들이 스스로 줄기를 키우고 바람을 버텨내는 동안, 땅 위의 사람들은 잠시 손을 놓는다.  바다에서도, 바람에 거칠게 밀려오는 파도에 굳이 맞서려 하지 않는다.  순리로서 몸을 쉬어야만 하는 시간, 사람들은 집 밖에서 집 안으로 눈을 돌려 주변을 정비한다.  1만 8천의 제주의 신이 잠시 하늘의 부름을 받아 자리를 비우는 신구간엔 집을 정비하거나 이사를 하여 터전을 정돈한다.  그러고 나면, 마을의 안녕과 바다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포제를 올린다.  몸을 쉬고 마음을 정돈하며 일 년을 준비하는 시간이 이즈음이다.  인간의 삶이란 자연에 몸을 맡겨 움직이고 다시 자연에 마음을 맡겨 청결을 준비하는 일련의 반복이다.  그에 비하면, 일 년 내내 자연에 상관없이 몸과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나의 삶은 얼마나 이질적인가 싶어진다.  자연의 흐름이 지배하는 이 섬에서 자연의 흐름에 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껄끄러움을 나는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제주의 겨울은 언제나 느지막히 시작한다.  12월 초만 해도 낚시하며 얼굴로 느끼는 바닷바람은 춥지 않다.  그러다 문득 바람에 한기가 실리면, 파도는 거칠게 일고 한라산은 구름속에서 눈을 쌓는다.  추위와 풀림의 반복이 여러차례 지나가고 그 사이에 한두번 밭담에 묻을 정도로 눈이 내린다.  제주의 겨울은 한기서린 바람으로 단정할 수 있다.  아무리 껴입어도, 바다위를 거쳐 불어오는 북풍은 몸 깊숙하게 한기를 배어넣는다.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과 파고드는 한기에 몸서리를 치는 것이 제주의 겨울이다.  그래도, 봄을 준비하는 것들은 한기배인 바람 안의 잔잔한 온기를 느끼는 것인지, 줄기마다 꽃망울을 굵직하게 부풀리고 있었다.  너른 밭담안 땅에서는 보리순이 올라오고, 바람에 휘둘리던 마늘잎은 한뼘 더 불쑥 자란 느낌이다.  설날 구정이 지난 2월의 첫 주, 우리집 텃밭의 매화는 벌써 꽃을 피웠다.
 
입춘굿을 통해 한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도민의 지혜가 목관아를 수 놓는다. (사진 제공=전영웅)


그리고 입춘이 찾아왔다.  한기를 품은 바람이 여전히 몸서리를 치게 하는 시기이지만, 봄은 서서히 피어나고 있어 청매줄기의 굵어진 꽃망울마냥 이 섬의 사람들도 봄을 준비하는 마음을 부풀린다.  입춘날에 섬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신성한 소인 낭쉐에 고사를 지내고, 마을원로가 낭쉐를 몰고 밭을 가는 시연을 함으로써 잡귀를 쫓고 일년의 풍요를 기원한다. 

자연의 흐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삶이고, 이 섬은 유독 그 의존이 더 두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인간은 자연의 흐름에 의존하는 것이라곤 옷차림이나 낚시같은 취미, 그리고 냉온방 유지비 정도뿐이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섬에도 현 시대의 사회경제체제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자연의 흐름에 상관없이 삶을 이어 나가야 하는 면모도 무시할 수 없는 부피로 섬을 뒤덮는다. 

자연은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기에, 입춘이라는 시작의 지점에서 낭쉐를 모시고 몰며 자연의 자비와 풍요를 기도한다.  하지만 사람의 세상은 인간의 의지로 유지되고 운영된다.  그 의지가 때로는 자연과 충돌하고 절충하는데, 이 섬의 지근은 그런 충돌과 절충의 격한 혼란이었다.  몰아치는 자본의 광풍에 풍경은 급격히 변해버렸고, 인간들은 서서히 자연의 통제에서 벗어나 각자의 이기심을 발휘하는 중이다.  혼란은 자본에서만이 아니고 정치사회적으로도 격하게 영향을 받고 있어,

한기배인 바람이 불어닥치는 가운데 사람들은 매주 촛불을 들어 올린다.  분명한 것은,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변해버린 풍경에 더욱 시려워졌고, 사람들은 몰아닥친 변화와 현재 처한 환경안에서 점점 더 많은 피로를 느낀다는 점이다.  겨울의 막바지에 조그맣게 느끼는 봄의 기운은 그래서 좀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기를 바라게 된다.  온기품은 공기가 이 섬을 뒤덮으면 시려운 풍경이 따뜻하고 정겨울 수 있기를, 그래서 계절의 순환의 말미에 풍경은 더 이상 시렵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의 세상에 상식이 단단하게 관철되어서 처절한 의지로 촛불을 드는 일이 제발 줄어들기를, 그래서 이 섬안에서 삶을 꾸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 피로해지기를 바란다.  

익숙해진 겨울 풍경과 입춘을 보낸 겨울의 막바지에 나는 다시 이 섬의 일년을 상상하고 희망한다.  나의 삶은 자연의 변화에 관계없이 하던 일을 계속 해야겠지만, 이 섬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반복에 의지했을 때 더욱 풍성해짐을 모두가 깨달았으면 한다.  풍경의 인위적인 변화가 멈추고 인간의 의지가 좀 더 자연의 흐름에 기댈 때, 이 섬은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곳임을 알았으면 한다.  그런 절제 안에서 내 시선이 좀 더 밝아지고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바람 가득했던 아침 풍경은 싸늘한 공기 부유하는 깊은 밤으로 흘렀다. 여전히 춥지만, 봄의 기운을 살포시 느끼는 이 지점에서 시간은 자연히 완연한 봄으로 이 공간을 흘려보낼 것이다.  봄으로의 기대,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바램들이 시간을 타고 흘려보내어지는 지점은 봄과 같은 그런 곳이기를 바란다.         

* 전영웅 : 제주도민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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