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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죽변항을 살찌운 해녀의 사회경제사

[대구경북=아시아뉴스통신] 남효선기자 송고시간 2017-03-22 09:37

'제주해녀'2016년 유네스코 등재...국가 무형문화재 지정 예고
전국 최고의 자연산 미역 생산지인 경북 울진군 울진읍 공세항에서 해녀들이 어촌계원들과 함께 미역채취작업을 펼치고 있다./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나잠채취업 어로문화의 주인공인 '해녀(海女)'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이 최근 '해녀'와 '해녀문화' 전반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것임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앞서 '제주 해녀(海女)'가 지난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데 이은 후속조치로 풀이된다.

이번 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해녀는 제주지역의 해녀 뿐 아니라 경북 울진지역 등 동해연안 지방의 해녀와 전국의 해녀들이 모두 포함됐다.

'해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 제주도가 지난 1971년 '해녀노래'를, 2008년 '물질 도구'를 문화재로 지정한 적은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해녀 문화 전반이 문화재로 지정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해녀가 한국의 전통적 해양문화와 여성 어로문화를 대표하는 존재로 시대적 변천을 넘어 해녀는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 왔으며, 해녀의 생업과 문화에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 및 공유지의 지속적인 이용과 분배에 관한 여러 가지 지혜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문화재 지정 배경을 밝혔다.

또 해녀에 관한 기록은 17세기 제주도 관련 기록에서 보이듯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해녀들의 '물질'은 원초적인 어로 형태로 다른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어로법이라고 해녀의 생업문화성의 독특성을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또 물질경험에서 축적된 생태환경에 대한 민속지식이 상당하고 동료해녀에 대한 배려와 협업, 해녀들의 신앙과 의례 등 해녀만의 독특한 공동체적 생활문화를 이루고 있다며 해녀와 관련된 문화는 무형문화재로서 역사성, 예술성, 고유성 등의 가치가 탁월하므로 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존·전승하고자한다고 배경을 밝혔다.

문화재청은 해녀와 관련된 문화가 협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공동체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지정예고 기간과 무형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후 최종적 지정여부를 결정한다.
 
경북 울진군 울진읍 공세항에서 해녀들이 자연산 미역채취작업을 마치고 뭍으로 오르고 있다./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해녀의 어로기술사

해녀는 "바다 속에 산소공급 장치 없이 들어가 해조류와 패류 캐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여성"으로 정의된다.

해녀를 지칭하는 용어는 '해녀' 또는 '잠녀(潛女)', '잠수(潛嫂)' 등으로 부르며 통일된 용어를 얻지 못한 채 학계에서 논쟁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인류학자 전경수는 "해녀라는 용어가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도입된 후 교과서를 비롯 여러 인쇄물에서 공식 용어로 사용됐기 때문에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보고 "탈식민지화의 시각에서 해녀 대신 잠녀나 잠수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예술가로 선조의 손자로 16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돼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를 남긴 이건(李健 1614~1662)은 "여자로서 바다 속에 들어가 해조류 및 패류를 잡는 사람을 潛女라고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뛰어난 정치가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남사록(南?錄)'에서 "潛女"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潛女"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잠녀"가 탈식민지화의 시각에서는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재 국가 기관이 사용하는 "해녀"를 사용하기로 한다.

해녀들은 특별한 어구나 장치가 없는 나잠어법(裸潛漁法)으로 제1종 공동어장인 수심 10m 이내의 얕은 바다에서 소라·전복·미역·톳·우뭇가사리 등 해초류와 패류를 채취하며, 가끔 작살로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해녀는 우리나라와 일본에 분포돼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해녀의 발상지는 제주도로 보며, 자연발생적인 생업수단의 하나로 비롯됐다고 그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해녀는 그 작업의 숙련도에 따라 상군(上軍)ㆍ중군(中軍)ㆍ하군(下軍)으로 나누며 제주 해녀의 경우에는 대부분 농사일을 겸해 농사일을 치르는 사이에 물때에 맞추어 바다로 나가 물질을 하므로, 이들의 생명의 텃밭은 뭍과 바다에 걸쳐 있는 셈이다.

해녀들이 바다를 무대로 작업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독특한 숨소리를 내는데 이를 '숨비소리','숨비질소리' 또는 '솜비소리','솜비질소리'라 한다.

해녀들은 물질을 위해 '물옷'이라는 해녀복을 입고 '눈'이라고 하는 수경을 낀다.

오늘날 해녀들이 즐겨 사용하는 '왕눈'이라는 수경은 지난 1950년대부터 쓰기 시작했으며 그 이전에는 '족세눈'이라는 쌍안경을 사용했다.

해녀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부력장치인 '테왁'과 채취물을 담는 자루인 '망시리', 전복 등을 캐는 길쭉한 쇠붙이인 '빗창', 미역 따위의 해조류를 베는 '정게호미'라는 낫과 조개 등을 캐는 쇠꼬챙이 갈퀴인 '갈고리' 등이다.
 
해녀의 미역채취작업 모습./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 해녀, 죽변항 등 울진 연안 해촌 나잠 어로기술 변혁의 주인공

해녀가 제주를 떠나 경북 울진군 죽변항을 비롯 동남해안 지방으로 이주한 것은 1930~1940년대 제주도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학계에 따르면 1930년대에서 1960년대 이르기 까지 제주도의 해녀 수는 2만3000여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1960년대 이후부터 제주지역의 해녀 수가 현저하게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수산어법 개정과 함께 어촌계가 체계화되고 특히 당시 제주도 전역에 걸쳐 개시된 고구마, 유채, 맥주용 보리, 감귤 등 환금작물의 대량적 재배가 그 배경으로 지목된다.

경북 울진군의 북쪽 관문이자 동해 연안의 대표적 항구인 죽변항에 제주 해녀가 처음으로 정착한 시기는 1930년대 후반기부터 1960년대에 걸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죽변항은 1904년 노일전쟁의 산물로 일본해군에 의해 현 죽변등대가 설치되는 등 동해안의 중요한 군사항으로 조성됐다.

또 1920년대 이후 형성된 ‘정어리바리’와 1938년 방파제가 조성되고 도로가 개설되면서 근대적 어항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단순히 동해안의 작은 어촌이 아니라 어항으로 성장하고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지정학적 위치가 집단으로 일감을 찾아 동해안으로 진입한 제주 해녀들의 정착을 유인한 요소로 해석된다.

특히 죽변항은 1930년대 명태.대구어업, 1940년대 정어리어업, 1960년대 꽁치.오징어어업의 성업과 함께 외부 인구 유입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이주정착 환경 또한 용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1960년 대 죽변항은 오징어 파시가 형성되면서 외부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들었으며 한국전쟁 과정에서 함경도에서 이주 정착한 함경도 출신 어업인과 제주에서 이주한 해녀들이 집단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당시 죽변항에 정착한 해녀는 24명으로 확인된다.(오선화 '죽변지역 이주잠녀의 적응과정 연구' 1998).

울진지역에 해녀들이 주로 집단적으로 거주한 곳은 현 죽변3리(봉수동;봉께)와 죽변4리(후리께;아바이촌) 등 죽변항의 2개 마을이 대표적이다.

현재도 봉께마을과 후리께마을은 죽변항 일원에서 '해녀촌'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 후포, 거일, 직산, 구산, 망양, 진복, 오산, 산포, 나곡리 등 울진연안 해촌 전 지역에서 나타난다.

현재 울진군에 등록돼 있는 '나잠어업' 등록인은 모두 189명이다.

그러나 실제 나잠어업에 종사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들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울진지방으로 정착한 해녀들의 1세대들로서 현재는 고령으로 작업이 불가능한 경우이다.

제주에서 죽변항을 비롯 울진 동해연안으로 이주 정착한 해녀들은 낯 선 포구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이 지닌 나잠어업 관련 민속지적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제주 해녀의 울진 연안 이주.정착은 함경도에서 이주해 온 어민들과 함께 미역채취 어로기술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특히 어촌계로 부르는 '1종공동어장'의 관리체계에 대한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당시의 '가족노동' 중심에서 '고용노동'체계로의 변화, 곧 생산관행의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울진 연안 해촌의 생계는 주로 미역채취에 의존하고 있었다.
 
자연산 미역 채취운반선인 무동력선 '떼배'./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당시 울진연안 해촌의 미역 채취 관행은 미역채취선인 '떼배(오동나무 8개정도로 엮어 만든 뗏목 형태의 작은 배로 돛 없이 노를 저어 이동하는 무동력선)'를 타고 대나무에 낫을 메 단 '낫대'로 '짬(수중에 발달한 바위군락)'에 붙은 미역을 잘라 채취하는 방식이었다.

제주 해녀의 이주와 함경도 출신 어민들의 이주로 출현한 것이 '덴마(전마선)'와 '짬수경(창경)'을 이용한 해녀와의 공동 미역채취 기술이다.

덴마와 창경, 해녀의 공동 작업은 1일 미역 채취량을 월등하게 향상시켰다.
 
전국 최고 브랜드인 '울진자연산 미역'작업하는 팔순 노인./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 '울진자연산 돌미역' 브랜드 강화 위한 '해녀'양성 기관 설립 절실

매년 4월이면 울진군의 최 북단에 위치한 북면 고포리를 비롯 연안해촌은 '돌미역(자연산 미역)' 채취작업으로 눈코뜰새 없는 일정을 보낸다.

이 무렵이면 연안 해촌의 어촌계별로 "돌미역 채취위한 해녀 구하기"에 분주하다.

돌미역은 채취 시기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으므로 그 시기를 놓치면 손실이 매우 크다.

이 때문에 울진 연안 해촌에서는 돌미역 채취철이면 해녀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지난해 울진 연안어장에서 생산된 자연산 미역은 공식 집계된 량만 960여톤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37억여원에 달한다.
 
전국 최고의 자연산 미역 생산지인 경북 울진군 북면 고포마을의 미역말리기 작업./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지난해 봄, 울진산 미역, 특히 울진 북면 고포마을, 죽변, 공세, 거일 등 울진연안 해촌에서 생산되는 '자연산미역'은 스무 올을 기준으로 한 단에 20만원을 넘겨 거래됐다.

"미역 없었으면 울진사람 모두 다 죽었지"라는 향언이 지금도 전승되고 있듯이 미역은 울진사람들의 생존을 지켜준 버팀목이었다.

미역은 굶주렸던 시절, 울진사람들을 살려 준 소중한 자원에서 이제는 자치단체를 살리는 생태어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연안 해촌 어민들은 질 좋은 자연산 미역을 제 때에 채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해녀 양성사업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고령화 추세를 보이고 있는 해녀의 어로기술을 체계적으로 전수하기 위한 '해녀학교' 등의 양성기관을 제도화 해 체계적으로 나잠어업기술을 전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울진 거일리 등 일부 주민들이 해녀학교 설립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울진군 브랜드로 관리되고 있는 '울진자연산 미역'의 지속가능한 생산을 통한 어민들의 경쟁력을 높이고 나아가 지자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연산 미역 채취의 첨병인 해녀의 양성이 절실한 과제로 제기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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