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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어느 법관의 자살

[강원=아시아뉴스통신] 이순철기자 송고시간 2017-08-11 21:40

강릉시민 함동식
중세 유럽의 형벌 제도를 살펴보면 형벌의 가혹함과 낙후된 사법체계에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시대인 중국의 명청(明淸)시대와 우리나라 조선의 사법제도를 유럽과 비교해 봐도 유럽의 후진적인 형벌제도를 금방 알아챌 수 있을 정도다.

중세 유럽에서 형벌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마녀재판이라고 불리는 종교재판이 였다.

유럽 각지에서 수 없이 많은 평범한 주민들이 마녀로 몰려 집단으로 처형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으니 이건 뭐 재판이 아니라 거의 양민을 학살하는 수준이 였다.

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유럽 사법역사에 기억될 만한 소위 칼라스 사건이 발생하였다. 프랑스의 부유한 상인인 장 칼라스(Jean Calas)가 자신의 장남을 살해하였다는 혐의로 모진 고문 끝에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다.

그러나 이사건은 프랑스의 계몽작가 볼테르에 의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볼테르는 칼라스의 장남은 자살하였으며 칼라스는 오판으로 인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칼라스 사건을 명백한 사법살인(司法殺人)으로 규정하고 재심청원 운동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재심이 인정되어 칼라스의 처형 3년만에 이 사건은 만장일치로 무죄가 선고 되었다. 얼핏 보아 단순해 보이는 이 사건의 이면에는 당시 유럽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는데 중세 유럽사회는 로마 카톨릭(구교)과 프로테스탄트(신교)의 종교적 갈등이 극에 달하였던 시기였다.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인 칼라스와 카톨릭 교도인 장남이 종교적 불화를 겪던중 아들은 자살하였고 카톨릭 교회는 단순한 자살 사건을 부풀려 칼라스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던 것이다.

철학의 역사에서도 중세시대를 암흑기라고 하지 않던가. 지나친 종교적 이념의 팽배와 신구교의 극렬한 대립은 인간의 자유와 사상을 억압하였고 합리적 사고는 실종 되었으며 형벌제도는 종교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에게 마녀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법철학자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1738~1794)는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 범죄와 형벌’이라는 책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1764년 밀라노에서 출간된 이책은 근대 형법학의 기초를 세운 명저이다. 형벌은 반드시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고 처벌 보다는 범죄 예방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사형제 폐지와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 절차를 강조하였다.

오늘날의 사법체계에 견주어 보아도 손색이 없는 내용이다. 특히 베카리아는 이 책에서 고문의 금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는데 ‘고문은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가장 수치스러운 방법’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역사에도 이런 가장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사법의 역사를 얼룩지게 한 사건이 무수히 많았다.

유신정권 연장을 위하여 중앙정보부가 주연을 맡고 검찰이 조연한 인혁당 사건이 대표적이다. 인혁당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도 하지만 붓끝이 더러워질까 두려워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지난 8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인혁당 사건을 언급하며 검찰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 하였다.

사건의 직접 당사자는 아니지만 범죄 수사의 총 책임자로서 지난일을 반성하고 사과 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문 총장의 용기 있는 사과에 박수를 보낸다.

중국의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 열전 70편중에 순리열전(循吏列傳)이 있다. 순리란 청관(淸官) 즉 청렴한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니 순리열전은 청관 다섯명의 행적을 기록한 열전이다.

그중에 이리(李離)라는 옥관(獄官)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리는 춘추시대 진(晉)나라 문공(文公)치세의 관리이다.

어느날 부하의 실수로 판결을 잘못하여 무고한 사람을 사형시켜 버린다. 뒤늦게 잘못을 알게된 이리는 진문공을 찾아가서 죄없는 사람을 죽였으니 자신도 죽어 마땅하다고 말한다.

진문공은 그대의 죄가 아니다고 만류하였으나 이리는 스스로 칼에 엎어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사기에는 옥관이라고 표현하였지만 판결을 잘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감옥을 관리하는 단순한 옥관이 아니라 판결을 겸하는 법관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진문공 치세이면 2600년 전이니 그시절에도 이런 훌륭한 관리가 있었다.

인혁당 사건은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다. 인혁당 사건 당시 수사와 재판에 관련된 사람만 어림 잡아도 수십명은 더 될 것이다.

그들은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였든 아니면 유신의 칼날이 무서워서 였든 유신의 잔혹한 마녀 재판에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신 치하의 사법부(司法府)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된 부(府)가 아니고 행정부에 속해 있는 부(部)라는 의미의 사법부(司法部)로 불리우며 조롱당하던 치욕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인혁당 사건이 있은지 올해로 43년의 세월이 흘렀다. 머릿속에 정의롭지 못한 지식으로 가득찬 그들 양심 없는 법관중 자살은 고사하고 사과 한마디 한 사람이 있는가.

당시 대법원 판결에 관여한 이일규 대법원 판사는 유일하게 형사소송법상 절차상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소수의견을 낸 분이다.

그러나 그 분 역시 아쉽다는 표현은 했을뿐 사과는 하지 않았다. 하기야 인혁당 사건 뿐이겠는가.

우리의 사법 역사를 더럽힌 수 많은 사건 관련자들이 반성하고 사과했다는 말을 나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이 나라의 관료나 법관들의 양심이 2600년 전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문 총장의 사과 발언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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