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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을 바라는 더욱 환하게 피어질 꽃망울

[서울=아시아뉴스통신] 배준철기자 송고시간 2017-10-31 18:25

나전칠기 명인 김용도 작가
 
김용도 작가가 그의 대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아시아뉴스통신=배준철 기자

지난 8~90년대의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부잣집들의 안방엔 항상 머스트 해브 아이템 마냥 반드시 위치해 있는 가구가 있었다.

주로 흑색이나 적색의 바탕위에 진주 빛의 문양들이 고풍스럽게 수놓은 듯 보이던 나전칠기 장롱이나 경대들.

이런 나전(螺鈿)과 옻칠은 신라시대 혹은 그 이전의 고대국가인 낙랑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왔다고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 전통의 칠공예 장식의 하나로 패(貝)의 껍데기를 얇게 갈아 오린 뒤 가구나 장식물의 표면에 붙여 꾸미는 기법을 말한다.

이 나전이라는 말은 韓, 中, 日에서 공통으로 쓰이는 한자어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자개’라는 말로 불려왔다.

나전칠기 제품이라 함은 보통 나무로 만들어진 제품의 표면에 수차례 옻칠을 하고 그 위에 전복이나 조개 또는 고동껍질 에서 채취해 가공한 자개무늬를 세공하여 덧붙인 제작물을 말한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대중의 사랑을 받아오던 자개 제품들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인기가 시들해져 이제는 ‘할머니의 방’에서나 볼 수 있는 예스러운(?) 가구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느 명인들이 그렇듯 묵묵히 외길을 걸으며 대한민국의 ‘나전칠기 명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김용도 작가. 짧은 인터뷰를 통해 그가 걸어왔고 지켜나갈 걸음걸음에 민족공예의 명맥이 당당히 숨 쉬고 있음을 배우는 시간을 가져봤다.
 
각종 대전에서 수상이력이 있는 김용도 작가의 작품들./아시아뉴스통신=배준철 기자


?그 시절의 장난감

“처음엔 ‘기술만이 살 길이다’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일이 벌써 47여년이 흘렀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던 김용도 작가.

경상남도 통영의 한산도 출신인 그는 유년 시절부터 섬마을 용초 바닷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던 조개나 고동 껍질들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아마 김 작가가 자개에 친숙함을 가지게 된 계기가 그 곳에서 출발됐음이 아닐까 한다.

그 후 1969년, 앞서 도시에 나가 기술을 배우던 동네 선배들의 권유로 나전칠기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통영 남망산에 있는 나전칠기 기술교습소 에서 김봉룡 선생이 기술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아 갔지만 이미 나전칠기 기술 교습소는 굳게 문이 닫혀있었다.

김 작가는 허탈한 마음으로 통영시내를 걷던 중 정말 우연처럼 그의 눈에 통영의 한 나전칠기 공예사가 들어왔다.

바로 작업장을 찾아 들어가 “기술이 배우고 싶다”고 청했고 공예사 대표는 김 작가의 당당함에 입사를 허락했다.

그렇게 김용도 작가는 첫 직장에서 나전에 관한 세공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기초부터 하나씩 세공기술을 배운지 5년쯤 지났을 무렵, 김 작가는 조금씩 그만의 세밀한 감각을 인정받으며 주변 선후배 기술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등 나날이 성장해 가고 있었다.

그렇게 탁월한 감각으로 기술을 연마하며 묵묵히 일하는 김용도 작가의 모습을 눈여겨보던 한 선배가 있었고 “남자는 큰 도시에서 일해야 한다면서 함께 서울에 가서 나전칠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라는 권유를 해왔다고 한다.

평소 서울 상경이 꿈이었던 그는 결국 지난 1975년, 23살이었던 해에 ‘선배는 경영과 영업을 맡고 김 작가는 기술부분을 도맡기’로 하며 큰 꿈을 안고 상경하기에 이른다.

이에 김 작가는 “지금 와서 보면 사실 5년 동안 일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모자람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한 분야에서 적어도 1만 번 이상의 작업을 진행해야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데 나의 경험은 턱없이 부족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도전이 두렵지 않던 젊음이 있었던 때였다.”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김용도 작가의 작품을 근거리에서 촬영한 모습이다./아시아뉴스통신=배준철 기자

?햇병아리 기술자의 감각

그렇게 선배와 서울에서의 첫 도전을 한지 3,4년이 흐른 지난 1978년 쯤 김용도 작가에겐 더 큰 꿈이 생겼고 스스로 독립의 길로 뛰어든다.

뛰어난 감각과 오랜 숙련기간이 더해져 자신감이 생겼던 그는 ‘공방’을 시작하고 세 명의 기술자와 함께 독립을 했다.

“기술만 하던 내가 영업도 하고 작업도 하고 하청일도 해오며 정말 열심히 살아봤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나전칠기의 인기와 함께 공방의 수입도 서서히 떨어져 갔고 결국 지난 1991년 공방을 접고 한 대형 공방에서 다시 기술자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기자가 사업체를 운영하던 이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업체의 직원이 됐는데 불편함은 없었냐고 묻자 “남들은 직접 공방을 운영하다가 다른 사람 밑에서 직원으로 일 하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저 ‘좋기만 했다.’고 대답했다.

내가 한 공방의 대표로써 이일저일 했을 때에는 수입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심지어는 수입이 전혀 없을 때도 있었는데 직원으로 일하게 되니 적어도 매월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질 않느냐 내 처지와는 상관없이 수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고 한가정의 가장으로서 의무를 다 한 기분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 ‘목예사’의 국승천 대표에게 지금까지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기 때문일까? 김용도 작가에게 다시금 좋은 제안이 들어왔다.

지난 1992년, 정수화(중요무형문화재) 선생의 소개로 한 사업체의 대표를 만났는데 “중국에서 나전칠기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한 1년쯤 중국 북경에서 나전칠기 기술에 관한 교육을 맡아줄 수 있냐”고 제안을 해왔고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했던 김 작가는 이내 수락했다.

근무하던 공방의 사장님도 배려를 해줘 한, 중 수교가 이뤄졌던 그해 말에 중국으로 가 1년간 기술교육을 맡았고,1994년 봄에 귀국해 공방에 복직했다.

“내가 중국에서 기술교육을 할 수 있었던 계기는 아마도 나전칠기 기능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공예예술가협회 이칠용 회장의 업적으로 나전칠기 부문이 국가기술로 인정받고 국가공인 자격증시대가 열리게 됐다. 지난 1986년 기능사 2급에 도전해 합격의 기쁨을 안았고 기능사 2급 취득 후 4년의 숙련 기간을 거쳐 지난 1990년도에는 기능사 1급에 도전해 합격했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 당시 도전자도 합격자도 나 혼자 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뒤로 기능사 1급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없어 현재 국내에선 유일무이하게 나 혼자만 1급인 걸로 안다.”
 
김용도 작가가 한 작품을 세심하게 다루고 있다./아시아뉴스통신=배준철 기자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차례로 나전칠기 기능사 2급과 1급을 보유하게 된 김용도 작가는 자신의 더 큰 커리어에 대한 갈증을 느꼈고 살길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지난 1992년부터 나전칠기 기능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당시 근무하고 있던 ‘목예사’ 소속으로 처음 출전했던 전국기능대회 서울시 예선 대회에서 나전칠기 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이후 지난 1994년도에는 개인소속으로 서울시 기능대회에 출전해 나전칠기 부문 은상을 받았고, 1997년도에는 서울시 기능대회에서 금상 수상과 함께 전국 기능대회 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1992년 기능대회 출전당시 심사위원 이었던 손대현(현 서울시 무형문화재 옻칠장) 선생을 만나게 됐고, 그때의 인연으로 지난 1995년부터 손 선생의 ‘수곡공방’에서 서로의 기술로 시너지를 내며 작품을 만들고 옻칠에 관한 기술을 전수 받으며 전수자로서 함께해왔다.

이후 2015년 말 퇴사할 때까지의 20여 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남기며, 급기야 김용도 작가는 지난 2014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 개인자격으로 출품했던 ‘원주시 옻칠공예대전’에서 대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뤘고, 같은 해 대한민국 나전칠기 나전줄음질(패세공)명인으로 선정된다.

지난 2016년에는 ‘남원시 전국 옻칠 목공예 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각종 대회에 출전해 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거머쥔 김용도 작가는 지난 2015년을 끝으로 퇴사, 모든 일선에서 물러나 그저 예술가로서의 삶으로만 살기로 다짐한다.

“내가 나전칠기를 시작한지도 어언 47년이 됐고 지난 세월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지금처럼 자택의 한 작업실에서 창밖의 자연을 벗 삼아 조용하게 새로운 작품들을 창작하고 매 순간 순간을 새로운 시작으로 생각하며 사는 삶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김용도 작가는 크고 작은 전시회에도 참여 하는가하면, 오는 7월 3일에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전시실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명인전‘에 ’호접당초문 좌경대‘,’무궁화고려당초문 방함‘,’일사당초문 호족반’, ‘태극문 쟁반’등의 작품으로 참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낙원을 꿈꾸는 무릉도인

“대부분의 나전칠기는 100% 수작업으로 이뤄지며 보통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적게는 3개월 이상이 걸린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자부심도 있을 테지만 나는 아주 섬세하고 정밀한 작업을 즐겨한다고 말하고 싶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무릉도원’에서 모티브를 가져오며 주로 산수화나 십장생을 담아내 표현하길 좋아하고 당초문을, 특히 일사선생의 당초문을 사랑한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이었던 고 일사 김봉룡 선생을 롤 모델로 삼아 기술적인 면과 예술적인 면 모두가 뛰어난 예술가가 되고 싶다. 또한 남들은 상업적인 작품을 만들어보라고 권유하지만 김용도 만의 개성이 담긴 예술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작품 활동을 고집한다.”

65세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지금도 매일같이 작업실에서 여러 공모전 출품을 예정으로 작품 활동에 몰두하는 김용도 작가. 그는 향후 2020년 내에 개인전을 열 계획이고 그간 참여해 왔던 단체전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한국 전통의 민족공예에 관심을 가질 청년들에게 “인내심이 필수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대학공부처럼 몇 년 안에 배울 수 있는 분야가 아니며 꾸준한 인내심으로 자만하지 말고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기술과 지식이 늘어갈 것임을 명심해야한다.”고 말하는 김용도 작가.

인터뷰 말미 그가 말했던 “지나온 1천년에 새로운 1천년을 입히는 작업을 할 것”이라는 말처럼 1천년이 지나도록 후세의 기억 속에 ‘진정한 전통공예 에술가’로서 각인되길 바라며 우리가 꿈꾸는 무릉도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자의적 의지로 생겨남을 배워봤다.

취재 : 배준철 기자(teen21@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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