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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데카브리스트

[강원=아시아뉴스통신] 이순철기자 송고시간 2017-12-14 12:43

강릉시민 함동식
중국의 한무제때 중량장 벼슬을 하고 있던 소무(蘇武)라는 사람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북방의 흉노에게 사신으로 간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무제와 흉노의 왕 선우는 오랜 전쟁으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마침 소무가 흉노에 도착한 직후 흉노 내부에서 발생한 반란 사건에 휘말려 소무는 강제로 억류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흉노의 왕 선우는 소무를 흙구덩이에 가두고 나의 신하가 되면 풀어 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무는 나는 한나라의 신하로 죽을 지언정 흉노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버티자 선우는 음식 마저 끊어 버렸다.

소무는 깔고 있는 거적을 풀어 씹고 내리는 눈을 받아 먹으면서 끝까지 절개를 지켰는데 이에 감동한 선우는 소무를 죽이지 않고 북해(北海)로 귀양을 보내 버렸다.

북해로 귀양간 소무에게 선우는 양(羊)을 치게 하였는데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너를 돌려 보내주겠노라고 하였다. 참 선우의 심술도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든다. 숫양이 어떻게 새끼를 낳는다는 말인가.

세월이 흘러 한무제가 죽고 소제(昭帝)가 즉위하여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 화친이 이루어지자 소무는 19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소무는 충절의 대명사로 불리워 졌으며 소무가 양을 친다는 뜻의 소무목양(蘇武牧羊)란 고사가 생겨나게 되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강항(姜沆)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서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의 성리학을 가르쳤는데 세이카는 이후 일본 성리학의 시조가 되었다.

강항은 세이카 등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가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을 기록한 책이 간양록(看羊錄)이다.

간양이란 양을 돌본다는 뜻이니 소무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소무의 고사 이후 양은 충절을 상징하는 동물로 인식 되었고 곧잘 동양화의 그림 소재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때도 변하지 않는 절개를 의미한다.

소무가 양을 치면서 귀양살이하던 북해는 지금의 러시아땅 바이칼 호수를 의미한다.

바이칼호가 바다처럼 넓다고 하여 북해라고 불렀는데 바이칼호 서쪽에 있는 도시 이르쿠츠크는 과거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중앙정부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이 머물렀던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이르쿠츠크는 얼어붙은 동토의 땅이요 회한의 땅이기도 하다. 이르쿠츠크를 이야기 하면서 데카브리스트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825년 12월 14일 전제 군주제의 폐지, 농노제의 혁파 등 봉건적 구습의 타파를 목표로 러시아의 젊은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데카브리는 러시아어로 12월이라는 뜻이니 데카브리스트는 12월 혁명당원을 의미한다. 이들의 거사가 12월에 일어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1812년 모스크바를 침공한 나폴레옹 군대를 격퇴시키면서 프랑스 파리까지 진격한 러시아의 청년 장교들은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에 감화되어 돌아온다.

이후 비밀 결사를 만들어 혁명을 모의 하던중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죽고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한 시기를 틈타 거사를 계획하고 리콜라이 1세의 대관식이 열리는 12월 14일 거사를 결행한다.

그러나 거사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주동자 5명은 처형되고 120명은 동토의 땅 이르쿠츠크로 유배를 떠난다. 데카브리스트의 미완의 혁명은 어찌보면 작고 보잘 것 없는 역사적 사건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남긴 족적은 위대한 데가 있다.

러시아 문학의 젖줄이라고 하는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를 지극히 존경했던 인물이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이들을 모티브로 하여 쓴 작품이다.

또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농노해방에 적극 앞장섰던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아버지와 아들” 등의 작품은 데카브리스트라는 사상적 근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데카브리스트가 아니였다면 평범한 글쟁이로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근대 러시아의 지성사(知性史)에서 이들 데카브리스트를 빼고 나면 논할게 없을 정도라는 생각마저 든다.

근대 일본에도 데카브리스트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1932년 5월 15일에 일어난 5.15사건은 일본의 해군 급진파 장교들이 수상관저에 난입해 쓰요시 수상을 암살한 사건이다.

이런일이 일본에는 또 있었다. 1936년 2월 26일 천황의 친정을 요구하는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 각료 3명을 암살하였다.

5.15사건이나 2.26사건은 규모면에서 차이가 있을뿐 본질적으로 같은 사건이다. 실추된 군부의 위상을 제고하고 군부 중심의 정국운영을 목표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였으니 이들에게서 무슨 감동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데카브리스트는 이들과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데카브리스트는 귀족 출신으로 제정 러시아의 계급 제도하에서 최대의 수혜자요 기득권자들 이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의 기득권을 부정하므로써 낙후된 조국 러시아에 충성을 다하였고 평생 고달픈 노동만 하다 죽어야 하는 농노들에 대하여 순수한 인간애를 보여 주었다.

이들의 순수한 열정과 지극한 인간애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오늘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시베리아 유형길에 오른 120명의 데카브리스트 중 18명은 기혼자들이었는데 남편과 이혼하면 귀족 신분을 유지해 주겠다는 니콜라이 1세의 선처가 있었지만 그 중 11명의 여인들은 황제의 은전을 거부하고 동토의 땅으로 남편을 찾아 나선다.

이들의 순애보는 그 이후 러시아 문학 작품에도 등장하고 언젠가 영화로도 만들어 졌다는 소식을 접한적이 있다. 요즘처럼 결혼을 무슨 흥정하듯 하고 이혼을 명예롭게 여기는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옛적 소무는 거적을 풀어 씹으면서 절개를 지켰고 11명의 부인들은 숭고한 사랑의 약속을 지켰으니 이들의 정신이야 말로 바이칼 호수의 맑은 물과 동토의 땅 이르쿠츠크의 흰눈을 닮아 있는 것 같다.

12월에 기념해야 할 날이 크리스마스 뿐이겠는가. 오늘 12월 14일은 데카브리스트의 미완의 혁명이 있었던 날이다. 그들의 숭고한 열정과 사랑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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