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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박상진의 삼국지 탐구

[인천=아시아뉴스통신] 김선근기자 송고시간 2015-04-22 00:08

제38편 “필사즉생 하편(必死卽生 中篇)”
 박상진 서울대학교 사범대 연구생./아시아뉴스통신 DB

 사실 지금부터 드릴 얘기는 ‘심증(心證)’뿐임을 먼저 말씀 드립니다.

 이미 잘 아시는 것처럼, 강동의 여몽은 병사들을 상인으로 위장시킨 뒤 관우 군의 관측소를 공략하고 당시 동쪽을 방비하는 1선이자 과거 유비의 형주 치소였던 유강구(油江口), 즉 공안(公安)으로 나아갑니다.

 그곳을 지키는 장수는 사인(士仁).

 연의에서 부사인(傅士仁)으로 나오기도 했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미방(麋芳)과 함께 관우를 배신한 인물이지요.

 그는 갑작스레 성 아래로 몰려온 여몽의 대군을 보면서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당시 성 안의 병력만으로 막기에 역부족이었던 것이지요.

 거기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낍니다.

 그때 여몽 측에서 서신을 보내 항복을 종용하지요.

 전후 상황을 대략 짐작한 사인은 ‘붙잡힙니다’.

 성 밖으로 나아가 항복은 하였으나 대치하다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역사의 미스터리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자, 여기까지는 여러분들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뭐가 미스터리인가? 바로 사인이 여몽의 서신에 보낸 답신에 ‘이상한’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서신은 왠지 모를 허탈감과 분노로 가득 담겨 있었다는 것이고, 특히 자신이 패배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패했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가 던진 말 가운데 “이것은 천명이 아니라 반드시 내응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此非天命, 必有內應)”라는 말이 그 의혹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그가 말한 ‘내응’, 그것은 과연 누구를 말했던 것일까요?

 오나라 측 사료는 그 중 한 명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로 미방이지요. 오록(吳錄)에 따르면, 미방은 군기 실화로 치죄당할 위험에 놓이게 되자 겁을 먹었고 그 무렵 손권의 유인을 받게 되자 내통합니다.

 실제로 미방의 기록에 남은 우번의 조롱(“반드시 닫아야 할 때는 열더니”)은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단서이기도 합니다.

 또 ‘미방 만의 단독 범행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제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성문을 연 미방의 단독 범행이라면 왜 우번의 조롱을 받았겠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문을 연 직후에도 우번은 미방을 일러 ‘구차하고 용렬한 마음을 품은 자’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으니 더 그렇지요.

 강동에 큰 공적을 세운 사람에 대한 태도로는 너무 졸렬하다는 것입니다.

 더 우스운 것은 이 범행 이후 포상입니다.

 촉에서 오로 투항한 인물 중 그 동안 가장 높은 벼슬까지 올랐던 인물은 학보(郝普)입니다.

 그는 익양 대치 당시 태수로 있다가 여몽의 계략으로 잘못 투항했던 인물로, 후일 위나라에서 보낸 고위 간첩에게 자기 불만을 토로했다가 주살돼 버린 인물이지요.

 그가 올랐던 가장 마지막 벼슬은 정위(廷尉).

 오늘날로 치면 법무부 장관 쯤 됩니다.

 그런데 이 미방의 범죄 뒤에 포상 받은 상황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미방은 정작 그다지 높은 벼슬을 받지도 못한 데다 우번에게 번번이 무시당하기 일쑤인데 비해, 의외의 인물이 구경 중 하나인 태상(太常)에 오르고 누대에 걸쳐 중신으로 발탁돼 중용됩니다.

 혹시 누구인지 짐작하십니까?

 바로 반준(潘濬)입니다.

 이 사람은 유표 시절부터 벼슬길에 나아갔던 인물로, 위나라로 갔던 왕찬이 기재(奇才)라며 칭찬을 늘어놓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당연히 유비도 그 소문을 들어 반준을 치중종사(治中從事), 즉 장군 막료 중 군수 담당에 임명하고 주의 행정을 모두 맡아 보게 합니다.

 이 임무는 제갈량이 형주를 떠나기 전에 맡았던 것으로, 그 만큼 능력을 인정받아 중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인물이 ‘눈물’ 한 번 찔끔 보이고 곧바로 손권에게 붙었다는 것입니다.

 오나라 측 기록에 보면, 반준은 미방의 항복 후 관사에 드러누워 ‘찔찔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손권이 친히 그에게 방문해 배를 어루만지며 ‘위로’를 하였고, 반준은 곧바로 침상에서 내려와 항복을 해 버립니다.

 그리고 곧 촉의 형주 영토 중 한 곳에서 다시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자, 군사 자문을 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5000명을 끌고 가 토벌해 버립니다.

 그런 뒤 오나라에 이후 중용돼 형주 일을 전담하며 여몽, 육손과 더불어서 무창(武昌)에서 촉과 위를 막는 최전선의 담당관을 맡거나 내직에서 중책을 맡아 여러 번 공을 세우게 되지요.

 오죽하면 유비 사람이었음에도 별도의 열전을 오나라 측에 남겼겠습니까?

 관우와는 오래 불화해서 공적도 별로 없었던 사람이 오나라 가서 펄펄 날았으니 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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