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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대전세종충남=아시아뉴스통신] 홍근진기자 송고시간 2017-10-22 08:11

25-서울이와 평양이가 염분이 나도록 오작교를 만들자
남북통일 기원 유라시아대륙 횡단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본지는 지난달 1일 네델란드 헤이그를 출발해 1년 2개월 동안 16개국 1만 6000km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중국과 북한을 거쳐 휴전선을 넘어 대한민국 품으로 돌아올 예정인 통일기원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씨(60)의 기고문을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다.[편집자주]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해 주는 세체니 다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사진=강명구)

“당신이 맥이 빠져 어두운 기분일 때, 당신의 눈에 눈물이 넘칠 때, 내가 눈물을 닦아 드리지요. 나는 당신 편이거든요. 세상의 바람이 차갑고 친구도 없을 때, 고뇌의 강에 걸린 다리처럼 내가 당신의 다리가 되어 드리지요.”

신기재 목사님의 안내로 부다페스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해주는 다리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흥얼거려본다.

9개의 멋지고 개성 있는 다리가 강서의 부다와 강동의 페스트를 하나의 도시로 엮어준다. 다리로 인해 강은 분단의 강이 아니라 평안과 풍요를 선사하는 화합의 강이 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세체니 다리는 이곳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이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는 두 도시를 이어주는 다리는 없었다.

언덕이 많고 전망 좋은 부다 지역에는 왕족과 귀족이 그 건너편 평지인 페스트에는 서민들이 살았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이 싫어서 다리를 놓지 않았다.

헝가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에 하나인 세체니 백작은 부친의 부음을 듣고 급히 빈으로 가야할 때 갑자기 불어난 강물의 물살이 거세 나룻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그때 백작은 강 양편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화합의 다리를 세우겠다고 결심을 했다.

1849년 다리가 완공되자 부다와 페스트는 부다페스트로 통합되었다. 다리는 세체니 다리로 명명되었고 ‘사슬 다리’라고도 불린다.
 
부다페스트 한국문화원서 김재환 문화원장, 신기재 목사님 그리고 평통위원들과 함께.(사진=강명구)

한국문화원에 들어서자 평창올림픽 마스코트인 수호랑과 반다비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전시실에는 마침 판화가 이철수의 판화가의 판화전 ‘새들 날아오르다’가 전시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이르게 도착하여서 판화전을 감상하고 있는데 김재환 문화원장이 내 옷차림으로 알아보고 안내를 하여 안으로 들어가 신기재 목사님을 비롯해 나중에 오신 평통위원들과 다과회를 가졌다. 

다음 주에 한국영화제가 시작되어 분주한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 자리를 마련해 주어 고맙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교민들이 응원을 해주고 격려를 해주는 얼마나 힘이 나는 줄 모르겠다.

평화통일을 위해서 세계 각국에서 민간외교를 펼치는 교민들의 마음을 모으는 일은 중요하다.
 
겔레르트 언덕 치타델라 성 꼭대기에 소련이 승전 기념으로 세운 평화의 여인상 모습.(사진=강명구)

겔레르트 언덕에 있는 치타델라 성은 보통의 요새와는 다르다. 보통 성은 도시나 왕궁, 시민들과 그 재산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헝가리 왕궁과 도시의 시민들을 감시하고 공격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왕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 언덕에 올라서면 다 보인다. 1848년에 일어난 헝가리인들의 독립투쟁이 이 요새 때문에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오스트리아가 물러나자 이번엔 나치가 이 요새를 차지했고 결국은 소련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인 장소이기도 했다.
 
치타렐라 성 맨 꼭대기에는 소련이 승전 기념으로 높이 40m에 달하는 평화의 여인상을 세웠다. 여인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를 치켜들고 시내를 굽어보고 서있다.

헝가리 인들의 승리가 아닌 소련의 승리의 상징으로 세워진 상으로 지금은 헝가리인의 승리의 상징으로 당당하게 치맛자락을 날리며 서있다.

치욕의 역사도 지워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면 승리의 역사가 된다.
 
마차시 교회와 어부의 요새, 부다 성이 어우러져 동화 속으로 들어 온 기분이 든다.(사진=강명구)

차를 적당한 곳에 파킹을 하고 위를 올려다보니 네오로마네스크와 네오고딕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어부의 요새가 있다.

신기재 목사님은 전문 관광가이드 이상으로 알차게 안내를 해준다.

1900년 경 지어진 이 요새는 헝가리 애국정신의 한 상징으로 어부들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면서 ‘어부의 요새’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차시 교회 앞에는 헝가리 최초의 왕으로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슈트반 왕의 조각상이 있다.  
 
마차시 교회와 어부의 요새, 부다 성이 함께 어우러져 동화 속으로 들어 온 기분이 든다. 디즈니랜드에 갔을 때 느낌과 같았다.

마차시 교회는 여기서 두 번이나 결혼한 마차시 왕의 이름을 딴 곳이다. 지붕은 기와가 아니라 도자기를 구워서 얹어서 더욱 신비감을 자아낸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의 위협 속에서 왕국의 재건을 위해 마차시 왕이 빈의 슈테판 대성당을 본떠 증축했는데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오스만이 차지하였다.

이 교회는 오스만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바뀌었다. 나중에 오스만이 물러나면서 복구되었다. 
 
헝가리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슈반트 1세 이름을 딴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큰 성당 야경.(사진=강명구)

10세기 말 헝가리에 정착한 마자르족은 이슈트반 1세가 즉위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나갔다.

그가 정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대가로 로마교황청은 그에게 왕관을 선사한다.

이슈트반에 대한 헝가리 사람들의 존경심은 대단하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성 이슈트반 성당은 그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멀리 떨어져 있는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 관습 그리고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가 비슷한 것들이 많이 발견된다면 그들은 공동의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증거가 된다.

나는 그 흔적들을 따라갈 것이며 그 일은 내게 엄청난 자부심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 옛날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위해 거주이전의 자유를 최대한 누렸고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교역을 해왔다.

이제 스마트 시대에 우리에게 그 자유가 더욱더 소중하고 필요한 덕목이 되었다.
 
21일 서울 을지로에서 나의 2000km 주파를 기념하고 후원하는 일일호프가 열렸다.(사진=평화마라톤)

이제 부다페스트의 일정을 마치고 더버시라는 작은 마을로 가는 중이다. 오늘은 그냥 5번 국도를 따라 쭉 가면 된다. 길을 찾아 헤매지 않아서 좋다.

거기다 서울에서는 2,000km 주파 기념으로 나를 후원하는 일일호프를 열어 350여 명이 모이는 대 성황을 이뤘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들판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은 민들레를 꺾어 바람에 훨훨 날려 보내며 즐거워한다. “...어느새 내 마음 민들레 홀씨되어 강바람타고 훨훨 네 곁으로 간다.” 내 마음은 벌써 5,000km, 만km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도나우 강 의 진주’로 불리는 부다페스트는 부다와 페스트가 정분이 나서 한 살림을 차리면서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다.

과연 서울이와 평양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서울이와 평양이가 염분이 날 수 있도록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교포들과 한반도에 사는 남, 북 시민들과 세계인들의 작은 마음 하나하나를 엮어서 오작교를 만드는 일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이념의 분단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것이고, 강대국들의 거칠고 험한 자국이기주의를 넘어서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다리가 될 것이다.

나는 바람 좋은 오늘도 그저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흥얼거리면서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다.
 
※사외 기고는 본사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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